오늘은 클린트와 만나기로 했다. 그게 일정의 전부였고 딱히 일을 할 예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심지어 내가 살던 곳도 아니니, 어쩌면 좀 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귀를 모자에 구겨 넣고 평소와 같은 긴 코트로 꼬리를 가렸다. 언제나 드러내서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나를 숨기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 좋아."
혹시 옷에 구김이 없는지 한번 확인을 하고, 가지런히 놓여있는 구두에 구둣주걱을 넣고 깔끔하게 발을 넣었다. 관리를 잘해서 주름 한 점 없이 광택이 나는 구두. 음... 좀 더 편한 복장을 입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닐 거 같기도 하고. 우리 사이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적당한 거지? 혼자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다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한 채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이상하게도 사건에는 항상 예외가 없는 거 같았다. 완전 낯선 공간, 클린트와 함께 거닐면 들렸던 경쾌한 발걸음 소리, 고소한 팝콘 냄새, 그리고 어딘가 들떠버린 내 마음. 모든 것이 평화로움을 상징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소란스러운 소리 덕에 평화는 금방 깨졌다. 아, 어쩐담. 이곳은 나의 세계는 아니지만... 신고 정도는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딱히 정의감이 넘치는 정의의 사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 일은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도덕성은 있으니까... 아마도.
"클린트? 아무래도..."
"사건이군"
간단하게 신고 정도라도 부탁할까 싶은 마음에 조용히 클린트와 시선을 맞췄다. 혹시 내가 부탁을 하면 이건 민폐일까. 나는 이쪽 세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지도 잘 모르니 선뜻 지금 상황을 주도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보면, 이미 소란이 났으니 진작에 신고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딱히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성이 반, 그래도 어찌 된 영문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호기심이 반. 이놈의 직업병은 아마 평생 안고 가야 할 골치병 일 것이다. 혹시 이런 오지랖도 선천적인 걸까? 아님 후천적? 뭐가 됐든 흥미롭다.
"... 보러 가겠나?"
잠잠 코 시선을 맞추니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하하, 나의 오지랖을 클린트에게 들켰나 보군. 과연 나는 당신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거울이 없으니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 클린트의 안내에 따라 저 너머에 벌어진 사건에 다가서면 그뿐이었다. 오늘은 좀 쉬나 했더니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또 모르지 않는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곳에 있을지.
그냥 갈 걸 그랬나? 잔뜩 날이선 클린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슬슬 쓸었다. 오늘은 둘이서 하하호호 영화나 보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게 주목적이었는데... 지금 클린트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을뿐더러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건너편에 있는 분과 사이가 그다지 안 좋은 거겠지. 그냥 가볍게 지나갈 수 없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클린트의 이런 날 선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야 나는 클린트와 언제나 둘이서 만나왔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만난 적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면 뭐하겠지만... 제법 신선했다. 사실 클린트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사람의 성향은 어디서든 묻어 나오는 법이었다. 오, 이것도 직업병일까? 하하, 지긋지긋하군 맥스웰. 너무 형사인 티를 내봤자 그에게 좋은 점수는 못 받을 텐데. 클린트가 나에게 질려도 그건 자업자득일 것이다.
"그쪽은..."
"좀 닥쳐. 제발 입 좀 다물고 얌전히 받아 적기나 하란 말이야!"
잠시 오고 가는 대화에 화자가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 순간 상대편이 나에게 관심을 돌려왔다. 사실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고 생각돼서 간소한 자기소개 정도라도 해야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싶어 입을 열러는 순간, 클린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난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마터면 클린트가 싫어하는 행동을 할뻔했군. 슬쩍 클린트의 낯빛을 살피니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은 좀 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왜일까. 나를 소개하기 싫은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 하긴, 따지고 보면 이곳에서는 외부인이니까.
흠...
외부인...
'외부인'이라...
"음, 괜찮다면 제가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원래 같았음 끼어들지 않았을 상황에 슬쩍 클린트에게 양해를 구하듯 팔을 내밀어 보이곤 입을 열었다. 그래, 원래 같았으면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라기엔 서로를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정의를 내리지는 못했지만, 내게 이런 틈을 허용한 채 얌전해진 그를 바라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나를 이 상황에서 강하게 배제하려고 했던 그의 행동을 한동안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맥스. 화났나?"
"네?"
그걸 물어야 할 건 내쪽인 거 같은데. 아까까지만 해도 거의 다툼에 가까운 의사소통을 한건 다름 아닌 클린트였다. 그리고 일이 그렇게 흘러간 건 자신 때문이었으므로 오히려 화났냐는 질문을 하려면 자신이 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대뜸 화났냐는 물음에 나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화날만한 일이 있었나?
"같이 보기로 했던 영화도 못 보고, 팝콘도 못 먹었잖나."
아, 그렇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기 위해 만났던 거지? 그제야 본연의 목적을 떠올리고 작게 탄식했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했던 행동이므로 전혀 화가 나지 않았지만 이쪽 세계로 초대한 건 클린트였으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이 미안했는지 마구 뭉개지는 뒤의 말들에 귀를 쫑긋 세웠다. 지금 기분은 마치 보고도 못 읽는 클린트의 글씨를 읽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소리는 선명한데... 대충 클린트가 어떤 뉘앙스로 말하는지 정도는 알 거 같았다. 언제나 선명하고 직선적인 그인데 이런 모습 또한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냥, 나는 다음번에, 그냥..."
"...?"
"아무것도 아니네.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들어가지."
새로운 건 좋은데 속이 시원하진 않군.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을 끝내지 않고 끝마쳐버리는 클린트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까 느꼈던 이 미묘한 답답함은 대체 무엇인지. 언제나 관계에 있어서 큰 고민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있어선 어려운 문제였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선뜻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밤이 늦었으니 조심해서 가게. 날도 추우니."
걷다 보니 어느새 같이 올 수 있는 길을 다 걸어버렸다. 당신과 있으면 왜 이렇게 시간이 짧게만 느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색해 보이는 손인사를 건네는 그의 몸짓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신이 아쉬운 걸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일까. 심장이 뭉그러지듯 덩어리 진 거 같은 느낌에 괜스레 가슴팍을 몇 번 문지르곤 손을 들어 올린다. 분명히 인사를 하려고 들어 올린 손이었다. 클린트가 말했듯 지금은 늦은 밤이었고, 날도 추웠고... 그리고...
"... 클린트"
'조심히 들어가세요.' 라고 말해야지. 그 생각이 무색하게 나는 클린트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고 깍지를 꼈다. 사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 아까 가슴팍을 문지를 때 느꼈던 생생한 고동은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움직일 것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마주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마주할 순간을 위해 지금을 준비할 순 있었다.
"다음엔 저희 집에 초대할게요. 클린트도 절 초대해 줬으니까 괜찮다면 한 번 들러줘요. 그리 재밌는 곳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방해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맞잡은 손에 괜히 힘을 한번 꼭 주고는 그대로 손을 놓았다. 미래야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난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당신만 괜찮다고 허락해주는 그날까지 곁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지금 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져서 당신에 대해 알고 싶었다. 정말 딱 거기까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연락할게요. 오늘 덕분에 즐거웠어요, 클린트."
조심스레 미소를 짓으며 인사를 건네곤 그대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설령 당신이 나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이 돌아선 모습까지 기쁜 마음으로 눈에 담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준비할 것이다.
당신을 마음에 담을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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